산부인과에서의 마지막 날. 호텔의 마지막 밤에 짐을 싸는 것처럼 설레며 짐을 싸고,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나서는 것처럼 놀라운 비용...을 지불하고 병원을 나섰다.
역시 바깥 공기는 상쾌하다. 물론 병원에서 탈출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상쾌함이었다. 한여름의 끝무렵이라 그래도 더운 날씨였는데 말이다.
물론 이것 뿐만은 아니다. 손에는 뭔가 따뜻하고 꼬물거리는 이불 뭉치가 들려있었다. 겉싸개에 쌓인 우리의 아이였다. 꼬물꼬물거릴 때마다 아빠를 아주 녹인다. 이대로 한참 안고 있고 싶었다.
불행히도 바로 근처의 산후조리원이 우리의 목적지였다. 바람은 금방 깨졌다. 들어가자마자 직원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며 아이부터 들어주는 것은... 배려였겠지만 뺏기는 느낌도 들어서 좀 아쉽기도 했다. 뭐 어쨌든 가까운 데로 잡은 것은 잘 한 선택 같았다.
약간의 문제가 있다면 내가 아직 산후조리원의 존재의 의미를 잘 모른다는 점이다. 그냥 아이 맡겨 놓고 쉬는 곳이다라는 이야기만 들었는데 엄마에게 쉬는 곳일 수도 있겠지만 아빠에겐 어떤 곳일지 전혀 몰랐다.
그런데 첫 날부터 뭔가 의미 하나를 알게 되었다. 아이를 빠르게 뺏겼지만 덕분에 빠르게 진행되는 것도 있었다.
"아이가 황달이 좀 있네요"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로 들었다면 약간 걱정했을 지도 모르겠지만, 다행히도 황달에 관한 지식은 좀 있었다. 특히 모유 수유를 하는 신생아라면 높은 확률로 황달이 있을 수도 있다고 익히 알고 있었다. 다만 병원에서는 아무런 정보도 조치도 없었다는 점이 안타깝다면 안타까운 건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산후조리원에서 이런 것도 챙겨주는구나 하면서 좋은 점 하나를 알게 되었다.
어쨌거나 우리 부부는 다시 아이를 신생아실에 납치(?)당한 신세가 되어 우리의 방으로 인도되었다. 짐을 정리한 후 멍- 하니 침대에 걸터앉아 있으니 왜인지 병원에서의 익숙했던 한 때가 떠올라 평화(?)롭고도 지겨운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는 병원이 아니었다. 지루하고도 평화로운 시간은 얼마 안되어 금방 깨졌다. 갑자기 방 문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보니 이모님이 아이를 안고 들어오셨다.
약간 당황했다. 하지만 곧이어 기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모자동실 시간입니다."
!!!
병원에서는 이름만 있고 돌아가지는 않던 시스템을 여기서 다시 듣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동작 중인 기능이다. 와 이런 게 정말 실존했다니! 좋은 세상이다!
이모님은 아이를 간이 침대에 올려놓고 궁금한 것이나 문제가 생기면 불러달라고 하며 방을 나갔다. 이제 방에는 꼬물거리는 귀여운 신생아 한 명과 당황한 아이의 아빠와 엄마 셋만 남았다.
그나마 아내는 병원에서 모유 수유를 하며 아이와 함께 있는 것에 몇일의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익숙하게 아이에게 젖을 먹이기 시작했고 나는 여전히 당황한 채로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나 이런저런 걱정 고민만 하고 있었다.
아이가 잠에 들고 그 때서야 아이의 통통한 볼을 살짝 만져본다. 정말 아기 피부다. 너무 부드럽다.
아이가 갑자기 귀여운 소리를 낸다. 큰일 났다. 내 몸 어딘가가 녹아내린 것 같다.
머릿속은 '귀여워'라는 단어로 가득 찼다.
남의 아이에게서는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정말이지 생소한 감정이었다. 아마도 신은 남자에게도 아빠로서 변할 수 있는 장치를 심어놓은 것 같다.
자고 있는 아이와 함께 기념으로 아내와 이런 저런 사진을 찍으며 놀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안타깝지만 초보 부모와 함께 있는 것은 아이에게 스트레스를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었지만 다시 신생아실로 우리의 아이를 돌려보냈다. 걱정하지 말자. 내일은 더 많이 만날 수 있을 거니깐.
난 굉장히 예민한 사람이고 집돌이라 환경이 바뀌면 화장실도 잘 못가고 잠도 거의 못 자는 체질이다. 하지만 병원에서 첫날의 피곤함에 리듬이 깨져버린 후 왜인지 적응력이 높아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산후조리원에 들어와서 첫날은 아주 제대로 골아떨어졌다.
이렇게 새로운 퀘스트의 첫 경험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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